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김홍도는 중인출신으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삶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그의 일부분 밖에 모르는 것이고, 산수화, 풍경화, 신선도 역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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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영조 말 쯤 화원으로 등용되어 도화서에서 출중한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치적 경제적 번영속에서 그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행보를 보면 1771년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776년 영조에 이어 정조가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1779년 김홍도에게 일본지도를 그릴 것을 명하여 일본으로 가서 일본지도를 모사하여 그려왔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와 일본의 천재화가 샤라쿠의 의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하여 동일 인물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홍도는 뛰어난 불화 작품도 있으며 정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를 기리는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이 불화는 서양의 화풍을 적용하여 그렸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화풍을 뛰어넘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중에 중인으로써 파격적으로 현감을 지냈으나 관리로써 업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홍도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며 기록도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춘화로도 많은 작품을 남겨놓고 있는데, 아래 링크에 춘화의 작품이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odde8s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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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태어난 정인지는 태종 14년 (1414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1등은 김작, 손미옥, 정인지등 3명이었다. 태종은 3명의 공동 1등의 답안지중 하나를 고르라고 명했으나 신하들은 이중 2개는 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태종은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답안지를 잡았는데 그것이 정인지의 답안이었다고 한다.

장원으로 급제한 정인지는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으나, 업무처리 미숙으로 많은 문책을 당한다. 게다가 심각한 업무 실수로 의금부에 갖히고, 벼슬이 떨어진 적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세종 1년 정인지는 명나라로부터 세종 즉위를 승인하는 외교문서를 맞는 의식을 할때 황색의장을 빼놓았다가 의금부에 투옥된다. 이것은 외교사절을 접대하는데 상대국의 국기를 빼놓은 것과 같은 실수였으니 얼마나 일처리를 못했는가 알 수 있다.

비슷한 직급이었던 김종서는 탁월한 업무처리로 인정을 받았던과 달리 정인지는 업무처리에는 맞지 않아 일을 잘못하는 관리로 찍혔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쪽에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세종이 계속 그의 소질을 키워 주며 중용을 했다. 세종은 정인지에게 집현전에 배속 시켜 역사편찬쪽의 업무를 주로 맡겼다.

정인지는 계속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승진을 했는데 탁월한 김종서에 항상 밀리는 신세였다. 김종서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역활이었다. 백성구휼, 6진 개척등의 어려운 일을 착착 해내어 김종서 예조판서, 정인지 형조판서 이후로는 계속 김종서는 정인지의 상관이었다. 정인지는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종서 보다 초반에는 벼슬이 빨랐으나 후반으로 갈 수록 김종서에 말리는 상황으로 추후 계유정란때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때 세조로 부터 김종서 아들의 며드리와 딸을 하사받기도 한다. 입사시험에 1등으로 들어왔는데, 나중에 꼴등으로 들어온 이가 부장이고 1등한 이가 과장인 것과 같으니, 정인지는 계속 컴플렉스에 시달리다가 나중에 김종서에게 처절하게 복수를 했는지 모른다.

실록에 따르면 정인지는 치부에 열중하여 수많은 재산을 축적하였고, 인근 땅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인가까지 빼앗았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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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내용을 보면 무인일 것 같은 태종 이방원은 천재였다. 
이방원은 만 16세인(1383년 우왕 9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것은 현재로 따지면 고등학생으로 행시 또는 사시를 패스한 것과 다름없다.
그때 급제한 동기는 심온 제거전 강상인과 함께 급제한 박습이 있다.

그리고 형제의 사랑도 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때 가족들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이방원은 가족들,  방번과 방석을 말에 태워다니며 굶지않게  보살폈다고 한다.
그가 2차의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간을 죽이지 않고 귀향을 보낸 것을 보면 특별히 배다른 형제에 대한 미움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집현전은 세종의 작품이 아닌 태종의 작품이라고 한다.
태종 재위시 설립하려 했으나 다음 대의 왕이 후대에 평가를 받으라고 보류하고 있다가 세종 즉위 후 설립하라고 했다고 한다.

대왕세종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종은 조직장악력이 탁월했으며, 전략적인 사고를 통해 차근 차근 목표를 실현하는 군주였으며, 동서양을 통털러 가장 명석한 왕이었던 것 같다.

태종 이방원이 이루어 놓은 기틀로 조선의 초석이 다져졌으며, 세종에서 부터 성종에 이르기 까지  안정된 사회체제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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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태종은 세자의 초궁장 스캔들로 인한 하급관료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부정부패와 연루된 하륜을 벼슬에서 물러가게 한다.

그럼 이 시기 실제 어떠한 사건들이 발생했을까?

연대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414년(태종14년) 육조직계제 실시, 노비변정도감 설치
1415년(태종15년) 양녕대군과 초궁장의 스캔들이 기록됨         
1415년(태종15년) 민무휼, 민무회의 옥
세자인 양녕대군이 외삼촌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전에 태종이 다른 두 외삼촌을 죽인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에 대해 고함. 이 고발을 통해 이듬해 1416년 민무휼과 민무회는 죽임을 당함.


1416년(태종16년) 하륜 사망. 처남 민무휼,민무회 제거
1416년(태종17년) 박은 우의정겸 수문관대제학에 오름
1416년(태종17년) 세자 양녕대군은 곽선의 첩 어리와의 스캔들을 일으킴. 이 사건으로 장인 김한로 사사

1417년(태종18년) 태종 선위파동으로 이숙번 탄핵, 양녕대군 폐세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줌

1418년(세종 1년) 심온 - 세종 즉위 후 사사

하륜이 물러가는 시점으로 민씨 형제들이 제거되고, 이숙번도 탄핵될 상황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어리와의 사랑으로 인해 왕의 자리까지 버렸다는 스캔들에 대한 이야기도 진행되는 직전에와 있다.
이러한 내용전개가 마무리 되면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세종의 외척인 심온을 제거하는 내용으로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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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의 수명은 평균 47세이고 평균재위 기간은 19년이다.
 
다음 도표를 보면 영조대왕이 최장수 임금님이었으며, 재위기간도 52년이었다.
 
1
태조
74
7
11
중종
57
39
21
영조
83
52
2
정종
63
2
12
인종
31
1
22
정조
49
24
3
태종
56
18
13
명종
34
22
23
순조
45
34
4
세종
54
32
14
선조
57
41
24
헌종
23
15
5
문종
39
2
15
광해군
67
15
25
철종
33
14
6
단종
17
2
16
인조
55
27
26
고종
67
43
7
세조
52
13
17
효종
41
10
27
순종
53
4
8
예종
20
1
18
현종
34
15
9
성종
38
25
19
숙종
60
46
10
연산군
31
12
20
경종
3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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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새로 등장한 장태우는 정조시절 노론벽파의 수장이었던 김종수의 가상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김종수는 역사적으로 어떤 행보를 보였는가?

정조 2년 유배에서 풀려나 복권되어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 홍국영과 대립하여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정조 초 당시 이조판서로서 홍국영(洪國榮)의 죄를 논하여 그를 축출시켰다.
이때 외척의 정치관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 정조를 설득시킨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정조와 대립할 것 같이 등장하는데, 사실 역사적으로는 정조가 크게 신임한 인물이었다.
좌의정을 거치며 사도세자 문제로 채제공과 맞서 한때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곧 풀려났고 관직에 물러나서도 정조는 극진히 대우했다.

앞으로의 구도는 노론벽파의 가상인물 (최석주 - 심환지, 장태우 - 김종수 대 남인 세력 (채제공 정약용)의 대결양상을 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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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보면 정조가 노론세력을 견제하고자 과거시험에 대한 공고를 낸다. 거기서 2000명을 뽑는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다음은 방목(조선 과거 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책)을 보면 정조시기에 대과(최종 시험)의 합격자 수 이다.
정조원년 정시에서 11명을 뽑았다.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상적으로 33며을 뽑는 것이 원칙이 었는데 정식에 11며을 뽑았다는 것을 보면 드라마의 내용은 과장인 것 같다.

정조 0년-정시(11명)
정조 1년-식년시(33명)
정조 1년 - 증광시(35명)
정조 1년-정시(9명)
정조 2년 - 정시(8명)
정조 2년-춘당대시(3명)
정조 3년 - 정시(3명)
정조 4년-식년시(44명)
정조 6년 - 함경도별시(7명)
정조 6년-평안도문과시(9명)
정조 6년 - 별시(15명)
정조 6년-비천당문과시(4명)
정조 7년 - 증광시(38명)
정조 7년-식년시(33명)
정조 7년 - 친시(5명)
정조 8년-정시(26명)
정조 9년 - 춘당대시(5명)
정조 9년-정시(10명)
정조 10년 - 별시(7명)
정조 10년-식년시(32명)
정조 10년 - 중시(8명)
정조 11년-정시(15명)
정조 13년 - 식년시(60명)
정조 13년-별시(5명)
정조 13년 - 춘당대시(6명)
정조 14년-증광시(46명)
정조 14년 - 별시(5명)
정조 14년-춘당대시(4명)
정조 16년 - 식년시(59명)
정조 18년-춘당대시(6명)
정조 18년 - 정시(50명)
정조 19년-춘당대시(24명)
정조 19년 - 식년시(49명)
정조 19년-별시(5명)
정조 20년 - 중시(10명)
정조 20년-별시(5명)
정조 22년 - 식년시(53명)
정조 23년-알성시(6명)
정조 24년 - 별시(4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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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 대표적인 등장인물들의 과거시험 성적이다. 정약용은 나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될 것 같아 목록에 포함시켰다. 장원급제 한 인물들은 없고, 대부분 중간 정도 성적이다. 나중에 나올 정약용의 성적이 특출나다.

채제공 - 영조 15년 정시에 병과 5등 => 응시자 26명 중 8등
홍인한 - 영조 29년 정시에 병과 2등 => 응시자 27명중 공동 10등
김귀주 - 영조 39년 증광시에 병과 33등 => 응시자 53명중 43등
정후겸 - 영조 42년 별시에 을과 1등 => 응시자 13명중 2등
홍국영 - 영조 48년 정시에 병과 11등 => 응시자 15명중 15등

장태우 - 가상인물
최석주 - 가상인물
정약용 - 정조 13년 식년시에 갑과 2등 => 최종합격 60명중 2등

조선의 최종시험인 대과는 8번의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뽑아놓고 왕 앞에서 논술 실력을 겨루는 형태로, 지금의 대입 논술고사와 유사한 형태였다.

성적을 보면 정후겸이 역시 등수가 높았으며, 김귀주와 홍국영은 하위권이었다. 그러나 응시자는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응시 자격에 든것 만으로 엄청난 실력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UR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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