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1등은 김작, 손미옥, 정인지등 3명이었다. 태종은 3명의 공동 1등의 답안지중 하나를 고르라고 명했으나 신하들은 이중 2개는 비슷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태종은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답안지를 잡았는데 그것이 정인지의 답안이었다고 한다.
장원으로 급제한 정인지는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으나, 업무처리 미숙으로 많은 문책을 당한다. 게다가 심각한 업무 실수로 의금부에 갖히고, 벼슬이 떨어진 적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세종 1년 정인지는 명나라로부터 세종 즉위를 승인하는 외교문서를 맞는 의식을 할때 황색의장을 빼놓았다가 의금부에 투옥된다. 이것은 외교사절을 접대하는데 상대국의 국기를 빼놓은 것과 같은 실수였으니 얼마나 일처리를 못했는가 알 수 있다.
비슷한 직급이었던 김종서는 탁월한 업무처리로 인정을 받았던과 달리 정인지는 업무처리에는 맞지 않아 일을 잘못하는 관리로 찍혔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쪽에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세종이 계속 그의 소질을 키워 주며 중용을 했다. 세종은 정인지에게 집현전에 배속 시켜 역사편찬쪽의 업무를 주로 맡겼다.
정인지는 계속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승진을 했는데 탁월한 김종서에 항상 밀리는 신세였다. 김종서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역활이었다. 백성구휼, 6진 개척등의 어려운 일을 착착 해내어 김종서 예조판서, 정인지 형조판서 이후로는 계속 김종서는 정인지의 상관이었다. 정인지는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종서 보다 초반에는 벼슬이 빨랐으나 후반으로 갈 수록 김종서에 말리는 상황으로 추후 계유정란때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때 세조로 부터 김종서 아들의 며드리와 딸을 하사받기도 한다. 입사시험에 1등으로 들어왔는데, 나중에 꼴등으로 들어온 이가 부장이고 1등한 이가 과장인 것과 같으니, 정인지는 계속 컴플렉스에 시달리다가 나중에 김종서에게 처절하게 복수를 했는지 모른다.
실록에 따르면 정인지는 치부에 열중하여 수많은 재산을 축적하였고, 인근 땅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의 인가까지 빼앗았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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